한국양육코칭협회
정가은 회장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초등학생 이상이 되면 그에 맞는 행동을 기대한다.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고, 숙제를 하면 좋겠고, 주도적인 학습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그리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좀 더 고도화된 것들을 요구한다. 그런데 자녀는 내가 생각하는 그 나이에 기대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이 부모 대부분의 견해이다.
학습이든 생활 습관이든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고 해서 자율성에 맡겨도 보지만, 결국 간섭하고 야단치지 않으면 자녀는 좀처럼 ‘알아서’ 하지 않기 때문에 쫓아다니 면서 잔소리하고, 야단치며 챙겨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기주도와는 또 멀어진다.
왜 우리 아이는 자기주도적이지 못할까?
그것은 부모가 착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이가 들면 문제 해결력도 같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3~4살 수준의 문제 해결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나이를 먹었다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유아 수준의 문제 해결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데, 부모가 왜 그 정도밖에 못하냐고 하면 본인도 답답하고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자존감도 낮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주도성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쌓아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인간의 심리사회적 발달 단계를 8단계까지 나누었는데, 그 중 4단계가 영아, 유아, 아동기에 쌓아야 하는 발달 단계로, 첫 번째 단계는 신뢰성, 두 번째 단계는 자율성, 세 번째 단계는 주도성, 그리고 네 번째 단계가 근면성이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이 단계를 밟아가며 자신만의 계단을 쌓아간다.
첫 번째 단계인 신뢰성은 0~12개월의 시기로, 부모가 아이의 기질을 잘 알아서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서 두려운 상태의 아기의 욕구를 수용해 주게 되면 이 세상은 안전하고, 믿을 만한 세상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이 계단을 잘 쌓아주면 이 아이는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로 다음 계단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단계인 자율성은 12~36개월의 시기로, 아이가 세상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돕는 양육을 해 주어야 한다. 위험 회피 성향이 강하거나 자극 추구 성향이 지나친, 혹은 의존도가 너무 높은, 이런 아이들의 기질을 잘 파악하여 이 세상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도록 부모가 돕는다면 아이들은 ‘나는 이 세상에서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고 다음 계단을 올라선다.
세 번째 단계인 주도성은 36개월~초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시기로, 스스로 선택해 보고, 책임을 져 보면서 내가 주도적으로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경험해 보는 시기다. 이때 부모님이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하려는 욕구를 수용해 주고,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초등학교 입학 후에 근면성의 단계로 나아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들은 자신이 신뢰성-자율성-주도성의 단계에서 쌓은 실력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사회를 경험해 간다. 만약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자녀의 욕구를 잘 수용해서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율성과 주도성을 갖추었다고 하면, 이 시기에는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하면서 좀 더 나은 문제 해결 방식을 연습하며 더욱 성숙해지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단계가 탄탄하지 않았고, 부모님이 너무 통제했거나 방임하거나, 혹은 자녀의 기질과 발달을 고려하지 못하고 양육했다면 초등학생 이후에 계단이 자꾸 흔들리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만날 때 자신을 신뢰하며 자율적이고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회피하거나 문제 앞에서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아이마다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대부분 자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부모가 요구하는 ‘주도적인 그 무언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관계에서, 학업에서, 학교생활에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야단치거나 설득하거나 하는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계단이 튼튼하지 못했는지 그 심리적인 기반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계단에서 아이가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계단에 나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를 유난히 사랑해서 이 계단을 아이가 스스로 쌓아 올라가기보다는 부모가 쌓아 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혹은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 경우를 보게 된다.
아이에게 왜 스스로 못 하냐고 다그치기 전에 우리 아이가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심리적 계단을 잘 쌓지 못해서 흔들리고 있는지 점검하고, 혹시 자율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고, 주도적으로 무언가 하지 못하는 2~3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다시 어린 시절에 했어야 하는 그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반석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는 비유를 많이 쓴다. 인생의 8개 단계에서 부모님과 함께 쌓는 이 4단계를 튼튼히 만들지 못했다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인생에 언젠가는 심리적인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초등학생, 중학생인데 여전히 자기주도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지 않다면 아이의 기질에 맞추어 수용하고 조절해 주는 단계를 잘 쌓아 주었는지 점검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다시 이 계단을 함께 쌓아주면 된다.